전시를 시작하며
대통령기록관은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여
이 동맹의 시발점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가 담긴 <이승만 대통령 외교서한문>의 복원을 마쳤습니다.
이에 한미동맹 7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확산시킴으로써 한미 관계가 미래를 향해 계속 전진할 수 있도록 특별전시를 마련하였습니다.
2023. 9. 20.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section 01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동맹의 시작
1. 해방, 정부수립 그리고 6·25전쟁(1945.8.~1951.6.)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 국제전 냉전체제 속에서 1948년 남북한 단독 정부가 수립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였습니다.
전선이 한반도 남단과 북단을 오가는 극단적인 전쟁상황이 전개되는 가운데, 1951년 봄부터 전선은 한반도 중간지대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8·15 해방의 기쁨
꿈에도 그리던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45.8.16. | 국가기록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이 열렸다.
1948.8.15.| 국가기록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 사령관을 김포공항에서 환영하는 이승만 대통령 1948.8.15.| NARA
북한군의 38선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였다. 북한 당국이 그들의 군대를 즉각 38도선으로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50.6.26.| NARA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인천상륙작전의 지휘함인 마운트 맥킨리(Mt.Mckinley)호 선상에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도일(James H. Doyle) 미 해군 소장, 라이트(E.K.Wright) 준장, 알몬드(Edward M.Almond) 소장과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1950.9.15.| 국가기록원
인천에 상륙한 미군 해병대
인천 해안에 병력과 장비를 양륙하는 4척의 LST(전차상륙함)의 모습이다.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명에 달했고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장비와 보급품을 운반하였다. 1950.9.15.| 국가기록원
태극기·성조기·유엔기를 들고 행진하는 군인
수도 서울 환도식은 중앙청에서 9월 29일 12시를 기해 거행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고립되었고, 미군과 국군의 본격적인 반격으로 북한군은 빠르게 후퇴하였다. 그리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1950.9.29.| NARA
section 01 2. 이승만 대통령과 정전협정 체결 과정(1951.6.~1953.7.)
정전논의가 포로교환 문제, 휴전선의 위치 문제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6월 정전협상을 반대하는 성명서(1951.6.27.)를 발표하였습니다.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으로 정전협상이 급진전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후 미국이 한국을 전략적 지역에서 제외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1953.6.17.)하였습니다.
타자기를 사용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이승만 대통령이 타자기를 사용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당시에는 영어 를 잘하는 외교관의 수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타자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
정전논의가 포로교환 문제, 휴전선의 위치 문제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6월 정전협상을 반대하는 성명서(1951.6.27.)를 발표하였습니다.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으로 정전협상이 급진전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후 미국이 한국을 전략적 지역에서 제외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을 요구(1953.6.17.)하였습니다.
정전설에 관한 중대 성명-더 무서운 전쟁의 서곡이 될 어떠한 평화제안도 수락치 않는다
소련 대표가 남한에 비공식 평화 제안을 하자, 1951년 6월 26일 국무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을 이승만 대통령 성명문으로 발표한 것으로, 소련의 평화 제안은 신뢰할 수 없으며, 「민족 통일과 공산주의자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장받아야 하며, 조건이 수락되지 않을 시 평화제안도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51.6.27.| 대통령기록관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한국의 무력통일을 요청하는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 전쟁포로 교환을 위한 공산 측의 제안은 1952년 12월 3일 유엔총회에 수용되면서 한국 내 전쟁이 정전될 것으로 보여 우리 조국의 입장에 대해 알려드리자면 공산측의 책략을 통해 휴전을 원하지 않으며, 우리는 유엔에 협조하지 않고 무력으로 통일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1953.4.2.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 수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무력통일을 제안하며 미군의 철군까지 감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상태로 정전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정부는 한국군과 같이 압록강까지 진격을 하지 않는 모든 동맹국 군대에게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1953.4.9.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 수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협정 반대 주장을 우려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협정 반대에 대해
① 북한정권 및 중국공산당의 무력공격을 물리쳐 한국을 도우려는 것이고,
② 정전협정은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단과 통일 한국에서 자유선거 실시로 이어질 정치적 논의의 신속한 착수를 의미한다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을 우려하였다.
1953.4.25.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수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 관련 기자회견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에서 정전(停戰), 포로 교환 등과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53.4.29. | 국가기록원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상호방위조약 초안 관련 서한미국의 정전협정에 동의하나, 미국과 한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 선행한다는 조건 아래 한국으로부터 공산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수를 제안하며, 향후 적국 침략 시 다른 국가와 상의 없이 군사원조와 비상지원을 제공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1953.5.30.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 수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부 차관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상호방위조약 관련 서한로버트슨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문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이 포함되어 있다. 초안에는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다는 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1953년 10월에 합의한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1953.6.5. | 대통령기록관 발신 : 로버트슨 차관보 | 수신 : 이승만 대통령.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한 한국의 정전협정 수용을 촉구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1953.6.7.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 수신 :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전협정은 적군이 침략의 과실을 포기한 것으로 유엔과 한국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한국통일을 위한 지속적 노력과 상호방위조약 협상 준비, 재건 지원 등을 제안하였다.
반공포로수용소제주도 반공포로수용소를 시찰 중인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반공포로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방문을 환영하는 반공포로들의 모습, 행진하는 반공포로들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1952.7.9. | 국가기록원
반공포로 석방
석방되기 전 반공포로들의 일상,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을 발표하는 연설 모습, 석방된 반공포로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953.6.18. | KTV, 국가기록원
반공한인포로 석방에 대하여(반공포로 석방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
“제네바 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시켰어야 할 터인데, UN당국들과 또 이 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우리의 설명을 들은 분들은 동정상으로나 원칙상으로나 동감을 가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 흠상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포로를 오늘 6월 18일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1953.6.18. |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강한 반대를 표명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사령부 관할 수용소의 북한군 전쟁포로들을 석방하도록 지시 하였다는 소식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매우 깊은 우려를 표하였다.
1953.6.19.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수신 : 이승만 대통령
로버트슨 특사 방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등과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협상을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방한한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 차관보의 모습이다.
1953.6.28. | KTV
이승만 대통령이 로버트슨 차관보에게 보낸 서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에 일방이 침략자 들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다른 일방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지원을 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지 않은 점에 대해 실망 스럽고, 한국은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은 해양국가와는 달리 지정학적으로 적의 위협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므로, 중심 화제로 충분히 고려해 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1953.7.7.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수신 : 로버트슨 차관보
로버트슨 차관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답신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과 관련, 미국 상원의 즉각적 비준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다음 회기에 할 수 있다고 합의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1953.7.8. | 대통령기록관
발신 : 로버트슨 차관보 | 수신 :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로버트슨 차관보의 이한(離韓)과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이 미국의 정책구상에 있어서 전략적 중심이자 충직하고 효과적인 동맹 으로서 배려되어야 함을 권고하였다.
1953.7.11.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수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전협정과 상호방위조약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표명한 답신
이승만 대통령은 상호방위조약 내 한국에 적국 침략 시 미국이 전쟁에 자동 개입 한다는 조항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의회 에서 헌법적 절차에 의해 가능하며 이는 침략을 충분히 억지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1953.7.25. | 대통령기록관
발신 : 덜레스 국무장관
수신 : 이승만 대통령
한미 정부 간에 일어난 오해를 풀고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보낸 답신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한국에 대한 지원만큼 타국을 지원했던 적은 없었다”는 회신은 한국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앞으로 상호 협의 하에 신뢰를 구축해 나가자고 하였다.
1953.7.26.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수신 : 덜레스 국무장관
역사적인 정전협정 조인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판문점에 들어온 후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1953.7.27. | KTV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유엔 측과 공산 측 대표
유엔군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왼쪽 가운데)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오른쪽 가운데)이 정전협정 조인을 위해 판문점에서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실무대표단이 협정에 서명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북한 김일성, 중공군 팽덕회가 각자의 집무실에서 서명하였다. 22시부터 공식 효력이 발효됨으로써 3년을 이어온 전쟁은 중단되었다.
1953.7.27. | 국가기록원
정전협정문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정전협정문은 서언과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어·한국어·중국어 총 6장이다.
서언에는 협정의 체결 목적 등이 써있으며, 1조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2조는 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3조는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4조는 쌍방 관계정부들에 관한 건의, 5조는 부칙, 부록은 중립국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에 관하여 규정되어 있다.
1953.7.27. | 국가기록원
정전조인에 관하여(정전협정 조인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와 미국 사이에 도달된 합의는 양국의 공동이익이 관련되어 있는 지역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국은 효과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1953.7.27. |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section 01 3. 최초이자 유일한 외국과의 군사동맹, 한미동맹 결성(1953.6.~1954.2.)
1953년 8월 8일 서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하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 유지하는 조건(한미합의의사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과의 동맹조약인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3.10.1.)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후‘전국민에게 보냄’이라는 담화문(1953.8.9.)을 통해 한미동맹은 국가안보뿐만 아니라 한국의 경제발전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합의의사록을 정식 조인하고, 조인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도 상호교환(1954.11.17.)하여 비로소 동맹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 (1954.11.18.) 하였습니다.
(발신인 덜레스 장관으로 추정)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한 서한상호방위조약의 초안에 약식 서명했고, 조약은 한국에서 공산 침략의 위협에 맞서 싸웠던 양국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공동 안보의 원칙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유엔헌장에 대한 충실한 지지로, 모든 실용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통일된 민주독립 한국의 복구라는 공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6개 사항에 동의했다.1953.8.7. | 대통령기록관, 발신 : 미상 | 수신 : 이승만 대통령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는 한미 대표
조인식 장소인 경무대에 이승만 대통령(뒷줄 왼쪽 에서 네 번째), 브리그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변영태 외무장관(앞줄 왼쪽)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앞줄 오른쪽)이 한미상호 방위조약에 가조인하고 있다.
1953.8.8. | 국가기록원
미래를 위한 동맹 -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이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장관을 환송하고 있다.
1953.8.8. | KTV, 국가기록원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후 덜레스 미국 국무 장관과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왼쪽에서 세번째)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왼쪽에서 네번째)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후 환담하는 모습이다.
1953.8.8. | 국가기록원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오른쪽)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정식조인을 위해 서명하고 있다.
1953.10.1. | NARA
한미상호방위조약문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 조약’이다.
한국의 방위를 위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유일한 군사동맹으로, 전문과 본문 6조, 부속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6·25전쟁과 정전협정 체결 과정을 겪으면서 정전 후 북한의 재침략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의 필요에 따라 체결되었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미방위체제는 한국방위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으며,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 설치(1978.11.07.)로 구체화되었다.
1953.10.1. | 국가기록원
전국민에게 보냄
이승만 대통령은 해당 연설문을 통해 한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 다음날 "미국정부와 공동방위조약이 설립된 것은 우리나라 독립 역사상 가장 긴중한 진전이다. (중략) 그 영향이 자손만대에 영구히 미칠 것이니 (중략) 이제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됐음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屢代)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1953.8.9. |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이승만 대통령이 닉슨 부통령의 방한과 관련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감사 서한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미국 의회 비준과 원조 예산 지원을 위한 노력에 감사를 표하며, 통일을 위한 열망을 전하였다.
1953.11.16.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이승만 대통령
수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한국군 증강과 관련해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한국의 군사력 및 역량의 발전과 증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1953.12.23. | 대통령기록관
발신 : 아이젠하워 대통령 | 수신 : 이승만 대통령
미국,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 공항에서 닉슨 부통령의 영접을 받고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모습이다. 공항에는 미국 정부를 대표해 닉슨 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 등 정부 고위인사, 래드포드 합참의장, 리지 웨이 육군참모총장 등 군 장성들이 도열해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였다.
1954.7.25.~8.13. | KTV
이대통령각하 방미수행기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의 순방 기록이 담겨 있다.
이화장 소장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환영하는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대통령
1954년 7월 25일 ~ 8월 13일 일정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공항에서 리처드 닉슨 부통령(왼쪽)과 함께 제1호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에 도착하여 아이젠하워 대통령(오른쪽)의 영접을 받으며 차에서 내리고 있는 모습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닉슨 부통령 부인과 함께 제2리무진을 타고 뒤이어 도착하였다.
1954.7.26. | 국가기록원
미국 의회 연설로 미국의 심장에 ‘자유를 향한 불굴의 투쟁’을 새긴 이승만 대통령
하원의장 조셉 마틴에 의해 "미국 국민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불굴의 자유전사"라고 소개된 이승만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직접 타이핑한 연설문을 통해 국군 40사단으로의 증강과 정전종결 선언 등을 촉구하며, 중공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과 자유세계의 공산세계에 대한 용기에 대해 연설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또한 대통령이 적접 작성하여 영어로 연설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1954.7.28. | 국가기록원
이승만 대통령 뉴욕에서 카퍼레이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방문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미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1954.8.2.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 교환의 건
한국 외무부 장관이 주미대사에게 한미상호 방위조약의 비준서와 비준서 교환 양식을 보내니 조속히 처리하고 비준서와 비준서 교환 증서를 송부해 줄 것을 요청한 문서이다.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10.1.)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 (1954.1.13.)와 국회 본회의에서 민의원 만장일치로 동의(1954.1.15.)를 얻었고, 미국 상원에서도 만장일치로 동의 (1954.1.19.)를 얻었기에 비준서를 미국 워싱턴에서 상호 교환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게 됨을 알렸다.
1954.2.1. | 대통령기록관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을 위해 한미합의의사록에 서명하는 모습
양유찬(오른쪽) 주미대사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을 위해 한미합의의사록에 서명하고 있다. ‘합의의사록’ 정식 조인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도 상호교환 됨으로써 비로소 동맹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1954.11.17. | NARA
section 02 역대 대통령선물로 살펴보는 한미 간의 우호
국가 정상 간 만남에서 선물을 건네는 것은 예의의 표현이며, 평화를 염원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23년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여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등을 통해 받은 뜻깊은 선물을 통해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양국의 노력과 역대 대통령들 간의 우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 ‘낚싯대’
이승만 대통령은 광나루 아래 강가나 경복궁 경회루에서 매주 토요일 낚시를 하는 것이 취미였다. 낚시 외에는 가끔 비원을 산책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곤 하는 것이 취미생활의 전부였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낚시를 좋아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덜레스 국무장관을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후 낚싯대를 선물하였다.
1953.8.8. | 이화장 소장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증정
낚싯대를 증정받는 이승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이 경무대에서 한미상호 방위조약 가조인 후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물인 낚싯대를 증정하고 있다. 전시 중인 낚싯대를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3.8.8. | KTV
이승만 대통령 내외(오른쪽 두 명)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왼쪽 두 명), 한미정상회담 후 백악관에서 개최된 만찬장에서 담소
1954년 7월 25일 ~ 8월 13일 일정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통일문제를 비롯한 한국군 증강 등 군사, 경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한미정상회담 후 한국 통일문제는 유엔 결의에 맡겨야 할 문제라는 데 합의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군사 원조를 위한 한미합의의사록 및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 등을 이끌어내 역사상 최초의 한미동맹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4.7.26. | 국가기록원
행운의 열쇠
미국 워싱턴 시는 외국의 국빈이 방문할 경우 시청 앞에 환영식장을 마련하여 백·청·적색의 끈이 매여있는 놋쇠에 금도금한 열쇠를 시장이 직접 선물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열쇠를 증정하였다. 열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소를 띈 얼굴로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내가 이 열쇠를 들고 있는 한 워싱턴으로 들어갈 때 나를 막는 사람은 없겠군. 내가 최대한 빨리 차를 타고 갈테니 따라와 봐. 아무도 나를 못 잡을 걸”이라고 말하면서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했다고 한다.
1954.7.26. | 국가기록원(사진) | 이화장 소장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 증정
행운의 열쇠
미국 워싱턴 시는 외국의 국빈이 방문할 경우 시청 앞에 환영식장을 마련하여 백·청·적색의 끈이 매여있는 놋쇠에 금도금한 열쇠를 시장이 직접 선물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열쇠를 증정하였다. 열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소를 띈 얼굴로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내가 이 열쇠를 들고 있는 한 워싱턴으로 들어갈 때 나를 막는 사람은 없겠군. 내가 최대한 빨리 차를 타고 갈테니 따라와 봐. 아무도 나를 못 잡을 걸”이라고 말하면서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했다고 한다.
1954.7.26. | 국가기록원(사진) | 이화장 소장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 증정
아폴로 11호 달착륙 기념패
1969년 11월 3일 달 착륙에 성공한 아폴로 11호 우주인 3인(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에드위 올드린)이 부인들과 함께 닉슨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방한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달 착륙 기념패를 선물하였다. 기념패 안에 닉슨 대통령의 서명과 우주인 암스트롱 등 3인의 서명이 함께 들어 있다.
1969.8.23. | 대통령기록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증정
월석(月石) 기념패
1969년 7월 16일 발사된 미국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달에서 가져온 월석(月石)으로 만든 기념패는 1970년 4월 29일 포터 주한 미국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할 당시 선물한 것이다. 기념패에는 “존경하는 한국 국민들에게 드림”이라는 제37대 미국 닉슨 대통령의 친필이 들어있으며, 달까지 가져갔다가 가져온 ‘우주 태극기’도 들어있다. 목제 받침대 위에 달에 가져갔던 태극기를 넣고, 월석 4조각이 든 진공유리 반구를 설치하였다.
1970.4.29. | 대통령기록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증정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리처드 닉슨 대통령(왼쪽)의 공동기자회견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8월 20일 4일간의 일정으로 미국 샌프란 시스코를 방문했으며, 닉슨 대통령과 두 차례의 회담을 가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총 8차례의 한미회담을 가졌으며, 자주국방을 통해 국가 안전과 경제발전을 위한 안보동맹을 강화하였다.
1969.8.22. | 대통령기록관
장미 조화 자기
레이건 대통령의 영부인인 낸시 데이비스 여사로부터 선물받은 것으로, 바닥 표면에는 "존경하는 미국 대통령 영부인 로널드 W. 레이건 여사에게. 198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일"과 "낸시 레이건 장미"라 적혀 있다. 1986년 1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이 연방법을 제정하여 미국의 국화를 장미로 정하였다는 것을 통해 뜻깊은 선물임을 알 수 있다.
1983.11.12. | 대통령기록관
낸시 데이비스(레이건 대통령 부인) 증정
전두환 대통령(왼쪽)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오른쪽)의 정상회담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부터 1월 28일부터 2월 6일까지 레이건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워싱턴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전두환 대통령은 1시간 20여 분간 한반도 안보와 세계 정세, 특히 주한미군 주둔 문제를 집중 논의한 뒤 한미 관계의 새로운 전개와 협력을 다짐하는 14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81.2.2. | 국가기록원
독수리 조각상
노태우 대통령은 7월 3일 낮 주미한국대사관저에서 퀘일 부통령 초청 오찬에 참석하여 딕 체니 국방장관의 접견을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서 “한미 양국 간의 굳건한 동맹 관계를 21세기까지 지속시켜 나가자”고 강조하였다. 체니 국방장관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독수리 조각품을 선물하였다. 나무 받침 위에 날개를 편 독수리를 은으로 형상화한 것이며, 독수리는 미국의 국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의미가 깊다.
1991.7.3. | 대통령기록관
딕 체니 국방장관 증정
노태우 대통령(왼쪽)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오른쪽) 의 정상회담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6월 29일부터 7월 7일까지 미국과 캐나다를 공식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백악관에서 가진 회담에서 유엔가입 후 북한의 개방 촉진, 국제원자력기구 핵안전협정 서명 등 한반도의 핵 문제와 시장개방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1991.7.2. | 국가기록원
크리스털 장식품
팔각기둥의 상부를 사선으로 절개한 형태로 표면의 1·3·5·7 면에 꽃문양을 파서 장식하였다. 받침에는 ‘APEC Econimic Leaders Meeting’이라는 문구와 빌 클린턴 대통령의 이름이 적혀있다.
1993.11.23. | 대통령기록관
빌 클린턴 대통령 증정
김영삼 대통령(왼쪽)과 빌 클린턴 대통령(오른쪽)의 정상회담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11월 17일부터 25일까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하여 미국을 공식 방문하여, 23일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APEC을 보다 강력한 결속과 상호의존을 지향한 경제 공동체적인 기구이자 개방적 공동체로 발전시키기로 뜻을 모았다.
1993.11.23. | 국가기록원
미국 위인 초상화 전집
초상화 전집의 제목은 제목은 NATIONAL PORTRAIT GALLERY이며, 가죽과 나무로 만들어진 케이스 내에 책 3권 및 422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등 위인들이 소개되어 있다.
1999.7.3. | 대통령기록관
빌 클린턴 대통령 증정
김대중 대통령(왼쪽)과 빌 클린턴 대통령(오른쪽)의 정상회담
김대중 대통령은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대북제재 단계적 완화 등의 합의를 이끌어내며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냈고,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미국 기업의 한국 투자 촉진을 위한 각종 지원 조처 등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8.6.9. | 국가기록원
서광범 주미공사 신임장 사본
노무현 대통령이 2006년 9월 미국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서 선물받은 1896년 서광범 조선 주미공사 신임장 사본이다. 이 신임장은 조선 말기 고종이 대미외교를 위해 파견(1895.12.)한 주미공사 서광범이 미국 제24대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에게 전달한 것이다. 100년이 훌쩍 넘는 외교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2006.9.14. | 대통령기록관
조지 W. 부시 대통령 증정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오른쪽)의 한미정상회담
미국을 실무방문한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북핵문제 등을 위한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북핵 6자회담이 필수라는 데 동의하고 북한에 핵무기 포기 및 6자회담 복귀를 촉구하였다.
2005.6.11. | 국가기록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저서 초판 세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미국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저서 초판 세트 루킹 포워드(Looking Forward)와 온 아워 웨이(On Our Way) 2권을 선물하였다. 루킹 포워드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에 대한 설명서이고, 온 아워 웨이는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후 100일간의 성과와 미국 재건을 위한 비전을 담고 있다.
2009.6.16. | 대통령기록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증정
이명박 대통령(왼쪽)과 버락 오바마(오른쪽)의 정상회담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국과 미국의 안보·군사동맹에 더해 FTA 체결을 통한 경제동맹 수립을 통해 양국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또한 각국의 재정위기 등으로 불안해진 국제경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통화 스와프를 포함한 양국 간 협력방안을 모색하기로 협의하였다.
2011.10.13. | 국가기록원
박근혜 대통령 미국 방문 기념 기념비석
2013년 5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받은 기념비석으로 비석 뒷면에는 한미동맹 60주년을 기념한다는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다.
2013.5.7. | 대통령기록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증정
박근혜 대통령(왼쪽)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오른쪽)의 정상회담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한미동맹 60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맹에서 글로벌 파트너십으로 격상하기로 합의하고 한미 간 긴밀한 대북정책 공조를 재확인하는 데 집중 협의하였다.
2013.5.7. | 대통령기록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시베리아 호랑이 판화
팝아트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 ~ 1987)의 작품으로 1983년 멸종위기에 처한 세계동물(아프리카 코끼리, 흰머리 독수리, 오랑우탄 등)을 판화로 제작한 작품 중 하나이다. 대통령기록관 소장 원본은 청와대에서 전시 중이다.
2018.5.22. | 대통령기록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증정
문재인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의 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정착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또한 북미 정상회담에서 실질적인 비핵화에 관한 구체적 합의를 이루어 내기 위해 한미 간에 긴밀히 공조해 나가겠다는 데에도 뜻을 같이 하였다.
2018.5.22. | 대통령기록관
section 03 서한문의 복원
대통령기록관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대통령기록물이 훼손되지 않고, 영구히 보존될 수 있도록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기관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서한문을 복원하는 과정과 복원 전후를 비교하는 사례를 영상에 담아 관람객 여러분들이 일련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