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영부인이 되다

대한민국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1900~1992) 여사는
오스트리아 빈 출생으로, 한국 이름은 이부란(李富蘭)‘부란’은 프란체스카의 ‘프란’을 음차한 것이다.
여사는 1933년 당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다음해 1934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1948년 경무대 청와대의 옛
명칭으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로 활용
의 안주인이 되었다.

여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호주댁’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당시 서양인을 영부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분위기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한국에서,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대통령의 부인으로서의
특별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승만대통령 내외분 기념촬영(1953)

이승만대통령 내외분 기념촬영(1953), 국가기록원 소장, CET0029368



이승만대통령 내외분 제3대 대통령취임 기념촬영(1956)

    이승만대통령 내외분 제3대 대통령취임 기념촬영(1956),국가기록원 소장, CET0029390

프란체스카 여사는 아내이자 인생의 동반자로서 그림자처럼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했다. 그녀는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발발한 한국전쟁, 이후의 전후 복구과정,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등 한국 현대사의 중요 사건들을 겪었다. 그리고 대통령직 사임 후 하와이로 떠나 이승만 대통령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대통령의 사임으로 한국을 떠나다

사임서 송부에 관한 건(1960)

  • 사임서 송부에 관한 건(1960),
  • 대통령기록관 소장, PBA0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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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리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의 직을 사임하고 물러 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1960.4.27)

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의를 밝히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 대한 부정과 4.19 혁명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으로 같은 해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당시 언론보도에는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정치적 피난처를 구하기 위한 망명 목적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고 전했지만, 정작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국내의 여론을 감안해 요양과 휴양을 목적으로 한 달 정도를 하와이에서 지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 박사는 29일 당지(호놀룰루)에 도착하여 휴양 차 이곳에 온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공항에서 기자들에게 그의 건강이 허용하는 한 되도록 빨리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였다.
<중략> 이 박사 부인은 그들이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하와이에 체류하겠냐는 질문에 답하며 그것은 이 박사가 얼마나 빨리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
- 경향신문, 1960년 5월 30일자

한국의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귀국할 생각으로 떠난 미국 길. 그러다 보니 이 대통령 내외는 하와이에 머무르는 내내 꾸준히 고국에 돌아갈 궁리를 하게 된다.

내년에 내 건강이 회복되면 아마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남은 희망은 귀국하는 것 <중략> 호랑이도 자기 굴에 돌아가서 죽기를 바라는 법이다.
- 경향신문, 1961년 11월 24일자

그러나 국내의 정치적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박정희 정부와 국내 언론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무엇보다 이 대통령의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급기야 이승만 대통령은 1962년 3월 17일을 출국 예정일로 정하고 귀국 준비를 서두르던 중, 한국 정부로부터 귀국 만류통보를 받기에 이른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에 앞서 사과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사과문을 발표하였건 아니하였건 정부의 허가가 없는 한 귀국하여서는 안 된다고 (호놀룰루) 총영사에게 지시하라. 사과문을 발표하더라도 거기에 대하여 국민의 감정이 풀릴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
-「이승만 박사 귀국시도 및 서거철」, 1962년 외교전문

고국행이 좌절되고 나서 이 대통령은 크게 낙심하여 스스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안 좋아졌고, 그로 인해 결국 마우나라니(Maunalani) 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는 요양원 측의 배려로 대통령의 병상을 돌볼 수 있었고,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이 뇌일혈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고국을 떠나 타국에서 맞은 외로운 죽음. 생전에 고국 땅을 밟기를 바랐던 대통령 내외의 꿈은 끝내 성사되지 못했고, 하와이에 머문 5년 2월간의 망향(望鄕)은 그렇게 저물었다.

홀로 남겨진 프란체스카 여사, 귀국을 희망하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1969.3.1)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1969.3.1), 대통령기록관 소장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1969.3.1) 다운로드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는 1965년 7월 23일 국내로 송환되었지만, 그림자처럼 그와 함께 했던 프란체스카 여사는 동행하지 못했다. 22일 하와이에서 있었던 영결식 이후 여사가 곧바로 병원에 입원했던 탓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과의 사별 후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다 1966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일시 방문했는데, 처음은 남편의 생신을 맞아 묘지 참배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대상(大喪) 초상 2년 후에 지내는 상례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방문 기간 중 양자인 이인수 씨는 여사에게 한국에 귀국해 함께 생활하자고 권유했으나, 여사는 본인의 귀국문제를 이인수 씨가 결혼해 가정을 이룬 뒤의 일로 미뤘다고 한다.(2013.11.14, 이인수 씨 면담내용 中) 그 이후로 여사는 줄곧 오스트리아에 머물렀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귀국 문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1969년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1969년 1월 22일에「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법률 제2086호이 제정되면서 전직 대통령과 그 유족에 대한 예우는 물론, 생계 지원문제가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당시 오스트리아 유양수 초대 대사도 여사와 자주 접촉하며, 언제라도 귀국할 결심이 서는 대로 한국에 돌아오시라는 한국정부의 뜻을 전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 여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완곡한 거부 의사를 밝혔고, 1969년 3월 서한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의 건강 문제로 인해서 한국 방문이 어렵다는 사정을 전하기도 했다.

고인된 본인의 사랑하는 남편의 생신일인 3월 26일에 한국을 방문해 달라는 각하의 친절한 초청을 감사히 받았으나, <중략> 불행히도 본인의 주치의는 그와 같은 장거리 여행을 허용치 않고 있습니다.
- 1969년 3월 1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 中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국에 귀국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지병인 담낭염에 십이지장병, 고혈압까지 겹쳐 투병 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육영수 여사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빠른 쾌유와 함께 한국으로 귀국해서 만나 뵙고 싶다는 서한을 전하게 된다. 특히 이 서한에는 외국인이었던 프란체스카여사가 한국에서도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배려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시 이곳 한국으로 돌아오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 많은 국민들은 여사님의 와병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곳 서울의 모습은 그 동안 안팎으로 많이 달라졌지요. 특히 상점이나 시장엔 여러 가지 일용 필수품들이 많이 나돌고 있어 외국인들도 이곳에서 생활하기가 퍽 좋아졌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됩니다.
- 1969년 8월 19일 육영수 여사의 서한 中

육영수 여사의 서한(1969.8.19)

육영수 여사의 서한(1969.8.19), 대통령기록관 소장

육영수 여사의 서한(1969.8.19) 다운로드

10년만의 귀국, 드디어 한국 땅을 밟다

이화장 건물 내·외부(1969)

이화장 건물 내·외부(1969), 국가기록원 소장, CET0047558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70년 5월 16일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0년 하와이로 떠난지 꼭 10년 만에, 남편을 타국 땅에서 떠나보낸지 5년 만에 한국에 영주하기 위해 돌아왔다.

아들, 며느리, 손자와 여러분을 보게 돼 매우 기쁘다.
남편과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에도 항상 한국은 내 생활 속에 있었다.
- 동아일보, 1970년 5월 16일자

당시는 전직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예우가 이미 제도적으로 보장1969년 2월 19일부터 연금 지급되었으며, 귀국 직전인 1970년 2월에는 정부에서 보관 중이던 이승만 대통령의 재산 300여점이 이화장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무엇보다 양자 이인수씨가 결혼해 1969년 11월 첫째 아들을 출산한 것 또한 여사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2013.11.14, 이인수 씨 면담내용 中)

프란체스카 여사는 귀국 후 이인수씨 내외와 이화장에서 생활했다. 이화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경무대로 들어가기 전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화장에서는 여사의 귀국을 앞두고 건물 내·외부에 대한 수리와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정리가 진행되었는데, 당시 언론보도의 내용으로 이화장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30여 년 동안 한 번도 수리를 못해 지붕은 비가 많이 샜고, 군데군데 벽과 기둥들이 칙칙하게 퇴색되었다.
- 조선일보, 1970년 5월 16일자

이와 관련해 박정희 대통령은 여사의 귀국 두달 전 이화장의 수리를 위해 30만원을 지원했는데, 여사는 이 소식을 듣고 박 대통령에게 감사의 서한을 보낸다.

(이화장의) 필요한 보수공사가 완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략> 또한 각하께서 이 박사의 유산을 반환토록 지시해 주신데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 1970년 3월 17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 中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좌-1970.3.17 / 우-1970.6.11), 대통령기록관 소장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 다운로드

여사의 서한에 박정희 대통령은 ‘문서처리전’을 통해 비서실장에게 수기로 지시사항을 전달했는데, 여사의 귀국과 관련해서 이화장의 내부 수리와 귀국 후 생활보조 문제를 협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지시의 결과 여사에게는 매달 50만원의 보조금과 개인용 크라운 차가 지급되었으며, 귀국 직후 프란체스카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1970.6.11)을 보면 이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져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70년 영주 귀국한 이래 1992년 별세할 때까지 22년을 이화장에 머물렀고, 평소의 염원대로 서울 국립묘지의 이승만 대통령 묘소 옆에 나란히 묻혔다. 대한민국 초대이자 최초의 외국인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 자신이 죽거든 틀니를 반드시 끼워주고, 남편이 독립운동 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어달라는 유지를 남길 만큼 한국과 남편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이부란’ 여사. 남편과 가족이 아니었다면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을 한국 땅에 영주 귀국하여 생을 마치신 그 분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