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욕조」는 국가기록에 관한 책이다. 기록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10년 넘게 미국 워싱턴과 메릴랜드에 위치한 내셔널 아카이브를 들락거리면서 얻은 국가기록에 관한 경험과 지식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 하고 있다. 기록에 관한 책이 이렇듯 전문학술지가 아닌 일반도서로 출판돼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009년 3월 내셔널 아카이브 설립 75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태프트 대통령이 100년 전 백악관에서 사용했던 대형욕조가 전시됐다. 이와 함께 파나마 운하 건설현장 시찰 시 승선할 노스캐롤라이나 호에 태프트 대통령이 사용할 초대형‘대통령 욕조’제작을 주문한 미색의 빛바랜 공문서 한 장이 눈길을 끌었다.
미국은 하찮게 보였을 수도 있는 욕조와 욕조 제작 주문서를 보관하였고, 이것을 100년 후 국민들에게 보여준다. 미국은 이런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고 소중히 보관한다. 미국은 기록의 힘을 알고 있다. 기록이 미국의 역사를 만들고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자긍심을 느끼게 하는 막강한 힘을.
미국의 슈퍼파워를 가동시키는‘문서기지’는 아카이브ⅠⅡ, 대통령도서관, FRC(연방기록물센터, Federal Records Center) 세 축으로 구축되어 있다.
1935년 워싱턴 시내에 모습을 드러낸 아카이브Ⅰ과 1993년 완공된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에 위치한 아카이브Ⅱ가 본부로서 역할을 하고 있고, 역대 대통령의 대통령기록물을 모아 놓은 13개의 대통령기록관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여 있으며, 아카이브로 이관 전 미국 연방정부의 모든 행정기록물을 모아놓은 FRC(연방기록물센터)도 미전역 17 곳에 흩어져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 문서고에는 90억장에 가까운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1900만장의 사진, 640장의 지도, 36만 릴(reel)에 달하는 마이크로필름, 11만개가 넘는 비디오테이프가 있다.
아카이브Ⅱ 현관 구석에 걸어놓은 현판에는“미국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란 말이 쓰여있다. 미국의 역사를 담은 곳이며, 당시의 역사를 꺼내볼 수 있는 보물창고다.
1934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국가기록물을 한곳에 모으기 위한 내셔널아카이브 창립법안이 만들어졌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소장자료를 제공하여 기록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임을 보여주며 아카이브에 대한 인식을 재평가 받게 된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점점 규모를 늘려갔지만 아카이브 위상은 위축되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1949년 아카이브는 총무청 산하기관으로 전락하는 등 내셔널 아카이브는 시련을 겪게 된다.
그 후 36년 만인 1985년 아카이브는 독립기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한국 정부기관에서 미국 NARA(National Archives & Records Administration)를‘국립기록청’이라고 번역하는데 잘못된 번역이라고 지적한다. 미국 내셔널 아카이브는 어느 기관에 속한 하급기관이 아니라 대통령 직속이다.
미국에서도 대통령제 초기만 해도 대통령 문서는 대통령 개인 사유물로 취급되어 퇴임 후 집으로 들고 가는 실정이어서 대통령기록물의 운명은 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통령도서관을 구상하여 미국 최초로 대통령기록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대통령들은 관례로서 대통령도서관을 짓고 대통령기록물을 이관했지만, 1978년 대통령기록물법을 제정하여 대통령기록물의 소유권을 연방정부에 귀속시키게 됐다. 레이건 대통령기록물 이관은 이 법을 처음 적용한 사례가 되었다.
미국의 정권교체는 백악관의 대통령기록물 이관에서 시작되고 끝이난다. 후버대통령에서 조지 W. 부시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13개의 대통령도서관은“대통령이 한 일을 역사 속으로 호위해 가는”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기록관리체계는 기록과 보관, 공개라는 3가지 철학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기록은 잘한 것뿐만 아니라 잘못한 것까지 적어놓는 것이다. 그래야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 된다. 적어놓은 기록은 보관해야 하고 보관해둔 기록은 적정 시기가 지나면 공개해야 한다. 미국의 국가기록관리 체계는 이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내셔널 아카이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곳이다. 출입 문턱도 낮다.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라 공공도서관 가듯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미국은 국가기록이 공공의 재산이고 국민의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알 권리를 주장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도 항상 떳떳하고 당당하다. 기록물 열람에 있어서 외국인과 자국민에 대한 차별도 없다.
기록이야말로 미국의 슈퍼파워를 가동하는 엔진이라고 한다. 미국은 그러한 기록의 힘을 진작부터 알고 있어 기록에 대한 인식이 특별했다. 저자는‘기록을 이렇게까지 하는 나라가 있구나, 기록을 이렇게까지 대접하는 나라가 있구나, 이런 걸 기록이라고 하는구나’에 대해 말하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기록관리 분야 종사자로서 책을 읽는 내내 미국의 확고한 국가기록에 대한 철학이 부러웠다. 기록은 공공재산으로 작은 것까지 기록하여 그것을 국가기록관리 체계 안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한다. 위안도 됐다. 미국의 국가기록관리 체계가 처음부터 완벽했던 것은 아니구나. 이렇게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있었고, 그것을 극복해냈던 사람들의 노력도 있었다.
우리나라도 15년 전 기록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공공기록물관리법을 만들었고 2007년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제정하였다. 2008년에는 성남에 기록관리 전문시설인 나라기록관을 완공하였다. 아직은 미국과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비슷한 과정을 통해 우리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희망도 보았다. 또한, 우리나라의 기록관리를 발전시켜 국가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기록이 어떤 것인지, 기록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관한 인식에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더 나아가 앞으로 우리나라는 국가기록 관리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할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