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가 사랑한 음식
동이 트기도 전, 경무대(청와대의 옛 명칭) 요리사인 양학준씨는 여느 때보다 일찍 출근해 술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전날 밤 술을 마신 터라 얼른 해장하고 대통령의 식사를 준비할 계획이었다. 국의 재료라고는 북어 머리와 북어 껍질, 파, 고추가 전부였다.
국이 한창 끓기 시작할 즈음, 어떻게 알았는지 이승만 대통령이 잠옷 바람으로 주방에 나타났다. 그런데, 대통령이 호통은커녕 미소를 지으며 아예 자리를 잡고 앉는 게 아닌가. 양학준씨가 국 냄비를 식탁에 올려놓자 대통령은 국을 대접 가득 떠서 마시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언제나 남편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긴 프란체스카 여사는 양 노인(영부인은 양학준 요리사를 그렇게 불렀다.)의 재료에 당근, 양배추, 고기 등을 더해 영양가를 높인 국을 만들어 권했지만, 대통령의 입맛을 돌리지 못했다.
“요리사 양학준 씨는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 이미
은퇴한 요리사였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요리를 좋아해 경무대 요리사로 채용했다.”
요리사 양학준 씨는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 이미 은퇴한 요리사였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요리를 좋아해 경무대 요리사로 채용했다. 한식과 양식을 두루 조리할 수 있었던 양학준 씨는 60세에 경무대 생활을 시작해 12년 동안 대통령의 음식을 만들었다.
식사를 비롯한 대통령의 건강관리는 철저히 영부인의 몫이었다. 대통령이 고령인 데다 당시엔 주치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한 끼도 빼놓지 않고 모든 음식을 먼저 먹어본 후에 대통령이 먹도록 했다. 자신이 곰국을 먹고 체한 일이 있는 다음부터는 대통령에게 절대 곰국을 주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오스트리아인이었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한국의 전통음식을 배우고 공부했다. 대통령의 건강영양식으로 무시래기 나물, 된장 시래깃국, 추어탕, 비지찌개, 냉 콩국 등을 올렸고 율무차, 들깨차, 오미자차, 유자차 등 계절과 효능에 따라 다양한 건강차를 늘 챙겼다.
이 대통령과 독립운동을 했던 이원순 씨에 따르면 대통령은 사실 대단한 미식가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어머니의 손맛을 그리워했지만, 양식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양식을 찾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대통령이 양노인을 좋아한 데는 한식과 양식을 두루 조리할 수 있었던 이유도 있었다.
변변한 음식점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시절, 미8군 장군식당이 장안의 인기를 끌었는데, 이승만 대통령도 단골손님 중 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이곳에서 일하는 한국인 요리사들을 불러 “나 대신 외국인들을 잘 돌봐주게”(1)라고 격려까지 했다고 한다.
경무대에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는 콩나물 잡채와 죽순을 넣은 닭찜이 대표 메뉴였다. 가끔은 불고기, 신선로, 구절판 같은 특별 메뉴를 선보이기도 했다.
대규모 만찬 행사도 있었다. 1948년 12월 24일, 외교사절을 위한 건국축하파티가 열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우방과 외교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니 우선 서울에 와있는 유엔임시위원단 대표들을 잘 대접해 주어야겠어. 그게 정부승인을 얻기 위해 파리(제3차 유엔총회가 열리고 있었다)에서 활동하는 우리 대표들의 활동을 돕는 일일 거라고 생각되는군.”(2)이라며 행사를 지시했다. 정부가 주최한 최초의 외교만찬인 셈이다.
만찬 장소는 창덕궁 인정전. 공식 초대를 받은 수백 명의 내외손님과 초청받지 않은 국내 요인까지 밀려들어 행사장은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만찬 메뉴로는 샌드위치, 불고기, 양주가 차려졌다. 당시, 의전 경험이 없던 경무대와 외무부는 1백여 명의 직원을 총동원하여 손님을 대접했다. 이는 정부가 주최한 최초의 외교만찬이었다.
(1) 인용 – 「세상 이렇습니다 <247> 호텔 종업원」, 『경향신문』, 1979.10.29
(2) 인용 – 「비록 한국외교 <20> 정부수립 직후 (2)」, 『경향신문』, 1975.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