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50년대부터 연탄을 제조하였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부리켓트’(연탄)를 만드는 것임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석탄을 많이 캐내는 것이 필요하므로 우선 급히 한백탄광 개발을 촉진시키고 한편으로 단양‧문경‧경주 등지의 폐광 되어있는 광산을 빨리 불하시켜야 되니 얼마 만에 얼마나 캘 수 있는지 수일 내에 보고할 것‘을 상공부장관에게 지시했다. </p><br/> 연탄소비가 증가하면서 1966년 연탄파동이 일자 대통령비서실은 연탄공장, 직매소, 소비자를 대상으로 연탄 수급 현황을 조사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66년 서울시 233개소 조사결과 10월 13일 기준 평균 가격은 11.47원이었는데, 마포구 대성연탄공장의 경우 오전에 100명이 줄지어 대기해도 사지 못했고 목동, 신정동 등 이재민 지구는 하루 1개씩 직접 구매하여 운반하는 상황이었다. </p><br/> 연탄 사용 급증으로 동절기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급증하자 정부는 신문, 텔레비전 등을 통해 예방방법을 널리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1978년에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연탄가스방지 연소기 개발, 6만 5천호 가옥구조 개선, 종합병원 등에 고압산소치료기 설치 등을 추진했다. </p><br/> <script> $(document).ready(function(){ $("#btnMore").on("click",function(ev){ ev.preventDefault(); $("#hdiv").toggle(300);}); $("#hdiv").hide(); }); </script> <a class="button size2 color1 invert" id="btnMore" href="return false">더보기</a> <div id='hdiv'> <br/><Br/> <p > 1973년 유류파동으로 연탄사용이 증가하면서 석탄 및 연탄 거래에 극심한 혼란이 커지자 연탄을 4㎏에서 3.6㎏으로 소형화하고 가격도 22원에서 28원으로 36.4% 인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일 수입으로 매일 귀갓길에 소위 ‘새끼 연탄’을 겨우 매입하는 노점 상인과 일용노동자는 수급량 부족으로 구매도 어렵지만 이마저도 불이 잘 꺼져 다시 피우는데 숯값이 약 50원에 이르고, 소요시간도 30∼40분 걸리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p><br/> <p > 이러한 가운데 1974년에는 석탄공사에서 무연탄 소비절약대책 일환으로 개량 연탄을 연구 개발하여 특허국에 실용신안 특허 출원을 한 바 있다. 개량 연탄은 단부 20㎜의 구명 직경을 5㎜정도 넓혀 착화시간은 단축하고 연소시간은 13분 정도 연장시켜 5.2% 열효율을 향상시키는 등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였다. </p><br/> <p > 1980년대에 들어서도 무연탄 생산 증가율은 소비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는 아궁이에서 연탄난방으로 전환. 농촌지역의 나무에서 연탄 사용 증가 등으로 연탄소비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1986년 가정부문 에너지 소비 센서스에 따르면 석탄류가 70.4%, 석유는 7.5%, 난방 설비별로는 연탄 보일러 64%, 연탄 아궁이 17.4%로 연탄 사용 가구가 80%를 넘었다. </p><br/> <p class="last"> 1988년 올림픽 이후 경제성장, 청정연료 선호로 인해 1989년부터 석탄사업합리화정책을 추진했다. 석탄산업합리화정책 추진으로 2005년 무연탄 생산은 1988년의 약 1/9의 수준인 283만 톤으로, 탄광은 347개에서 7개로, 탄광근로자는 6만 2천명에서 6천명으로 감소했다. </p><br/>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