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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동맹의 시작
  • 70주년 기획전시
  • 한미동맹 기록물 복원사례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을 만나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을 만나다

자주찾는 정보

전시관 관람

개관일 : 화요일~일요일, 10시-18시

휴관일 : 월요일, 법정공휴일(어린이날은 개관)

관람료 : 무료

문     의 : 044-211-2181, 2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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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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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록 그순간

  • 연탄

    우리나라는 1950년대부터 연탄을 제조하였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부리켓트’(연탄)를 만드는 것임을 강조하며 이를 위해 석탄을 많이 캐내는 것이 필요하므로 우선 급히 한백탄광 개발을 촉진시키고 한편으로 단양‧문경‧경주 등지의 폐광 되어있는 광산을 빨리 불하시켜야 되니 얼마 만에 얼마나 캘 수 있는지 수일 내에 보고할 것‘을 상공부장관에게 지시했다. </p><br/> 연탄소비가 증가하면서 1966년 연탄파동이 일자 대통령비서실은 연탄공장, 직매소, 소비자를 대상으로 연탄 수급 현황을 조사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66년 서울시 233개소 조사결과 10월 13일 기준 평균 가격은 11.47원이었는데, 마포구 대성연탄공장의 경우 오전에 100명이 줄지어 대기해도 사지 못했고 목동, 신정동 등 이재민 지구는 하루 1개씩 직접 구매하여 운반하는 상황이었다. </p><br/> 연탄 사용 급증으로 동절기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급증하자 정부는 신문, 텔레비전 등을 통해 예방방법을 널리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1978년에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연탄가스방지 연소기 개발, 6만 5천호 가옥구조 개선, 종합병원 등에 고압산소치료기 설치 등을 추진했다. </p><br/> <script> $(document).ready(function(){ $("#btnMore").on("click",function(ev){ ev.preventDefault(); $("#hdiv").toggle(300);}); $("#hdiv").hide(); }); </script> <a class="button size2 color1 invert" id="btnMore" href="return false">더보기</a> <div id='hdiv'> <br/><Br/> <p > 1973년 유류파동으로 연탄사용이 증가하면서 석탄 및 연탄 거래에 극심한 혼란이 커지자 연탄을 4㎏에서 3.6㎏으로 소형화하고 가격도 22원에서 28원으로 36.4% 인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일 수입으로 매일 귀갓길에 소위 ‘새끼 연탄’을 겨우 매입하는 노점 상인과 일용노동자는 수급량 부족으로 구매도 어렵지만 이마저도 불이 잘 꺼져 다시 피우는데 숯값이 약 50원에 이르고, 소요시간도 30∼40분 걸리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p><br/> <p > 이러한 가운데 1974년에는 석탄공사에서 무연탄 소비절약대책 일환으로 개량 연탄을 연구 개발하여 특허국에 실용신안 특허 출원을 한 바 있다. 개량 연탄은 단부 20㎜의 구명 직경을 5㎜정도 넓혀 착화시간은 단축하고 연소시간은 13분 정도 연장시켜 5.2% 열효율을 향상시키는 등의 이점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였다. </p><br/> <p > 1980년대에 들어서도 무연탄 생산 증가율은 소비 증가율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는 아궁이에서 연탄난방으로 전환. 농촌지역의 나무에서 연탄 사용 증가 등으로 연탄소비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1986년 가정부문 에너지 소비 센서스에 따르면 석탄류가 70.4%, 석유는 7.5%, 난방 설비별로는 연탄 보일러 64%, 연탄 아궁이 17.4%로 연탄 사용 가구가 80%를 넘었다. </p><br/> <p class="last"> 1988년 올림픽 이후 경제성장, 청정연료 선호로 인해 1989년부터 석탄사업합리화정책을 추진했다. 석탄산업합리화정책 추진으로 2005년 무연탄 생산은 1988년의 약 1/9의 수준인 283만 톤으로, 탄광은 347개에서 7개로, 탄광근로자는 6만 2천명에서 6천명으로 감소했다. </p><br/> </div>

  • 농업인의 날

    ‘농업인의 날’은 WTO체제 출범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업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고 농업·농촌의 중요성과 가치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1996년부터 제정·시행하였다. </p><br/> 기존에는 매년 5월 넷째 화요일을 ‘권농일’로 지정하여 정부행사를 가졌다. 1968년 제20회 권농일 행사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가뭄에도 풍년이 될 수 있도록 수자원 및 지하수 개발, 관계시설ㆍ다목적 댐 건설을 추진하고, 특용작물ㆍ축산업 등 농가소득을 높일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할 것을 강조했다. </p><br/> 이처럼 권농일은 식량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농민들에게 생산 증대를 위해 더욱 힘쓰도록 독려하는 뜻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소비자의 기호에 맞고 고품질의 농산물 생산이 요구되고 특히 WTO체제 출범 이후 개방화, 세계화 그리고 전문화 등 변화된 농업 환경에 맞춰 새로운 농업인의 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p><br/> <script> $(document).ready(function(){ $("#btnMore").on("click",function(ev){ ev.preventDefault(); $("#hdiv").toggle(300);}); $("#hdiv").hide(); }); </script> <a class="button size2 color1 invert" id="btnMore" href="return false">더보기</a> <div id='hdiv'> <br/><Br/> <p > 1992년 12월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농업인의 날 제정을 선거 공약에 포함하면서 추진하였는데 기념일 날짜를 두고 관련 단체 간 이견이 지속되었다. 정무수석실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한 문서에 따르면, 농민단체들은 11이라는 숫자가 주역으로 풀이할 때 흙(土)을 상징한다며 11월 11일을, 농·축협 등의 기관들은 축제 분위기 속에 행사를 개최할 수 있다며 추석 다음 날을 주장했다. 결국 1996년 5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권농의 날을 폐지하는 대신 11월 11일을 농어업인의 날로 제정하였다. </p><br/> <p > 다만, 그해 8월 해양수산부가 신설됨에 따라 ‘농업인의 날’로 명칭을 바꾸고 제1회 기념식을 가졌다. 기념식은 전국농민단체협의회를 비롯한 20개 단체 대표 등 4천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렸다. 주요 행사로 농업인의 날 기념식 및 자축행사, 농업인합동결혼식, 여성 농업인 백일장, 학술대회, 우수농산물 품평회 등이 열렸다. </p><br/> <p > 제1회 농업인의 날 기념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농업은 성장하는 복합산업이며 부가가치와 고용을 창출하는 미래산업이라고 강조하며,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업 구조개선사업의 집행을 앞당기고 농어촌 특별세 등 연간 8조원의 재정을 투입하고, 환경농업육성법을 제정하여 우리 농업이 환경을 가꾸고 지키는 생명산업으로 육성하겠다고 하겠다고 밝혔다. </p><br/> <p class="last"> 농업인의 날을 맞아 공개하는 농업인의 날 행사 계획 및 결과, 기념행사 동영상, 대통령기념사 등의 대통령기록물은 농업인의 날 제정 경위와 역대 정부의 농업정책 방향 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p><br/>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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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시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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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기록’ 콘텐츠는 매년 분야별로 소장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학술적 가치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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