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외교 3단체 초청 연설(서울과 베를린, 자유와 번영의 동반자) | |||||
연설일자 | 1995.03.07 | 대통령 | 김영삼 | 연설장소 | 국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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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기타 | 출처 | 김영삼대통령연설문집 제3권 / 대통령비서실 원문보기 | ||
신사 숙녀 여러분! 방금 따뜻한 말씀으로 나를 소개해 주신 존경하는 폰 바이재커 전 독일연방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세계적인 지도자이신 폰 바이재커 박사는 독일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종교지도사로서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신 한국민의 오랜 친구입니다. 아울러 나에게 이 귀중한 기회를 주신 베를린 아스펜 연구소와 독일유엔협회, 그리고 독일외교정책협회 여러분에게 사의를 표합니다. 나는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유럽의 평화와 번영의 새 중심으로 도약하고 있음을 축하하러 왔습니다. 또한 통일독일에서 펼쳐지고 있는 대역사의 현장을 직접 보고, 소중한 교훈을 얻고자 여러분을 찾아왔습니다. 독일 국민의 통일 드라마는 분단 조국을 가진 한국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과 독일 국민에게 한국 국민의 따뜻한 우정을 전하며, 통일과정에서 여러분이 보여준 용기와 인내, 그리고 희생정신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독일과 나의 인연은 멀리 나의 20대 학창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건국의 초기과정에 있었던 한국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이 대학생들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내가 다니던 서울대학교는 유럽식 학풍이 두드러진 곳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나의 전공이었던 철학분야는 독일의 독일의 학풍이 풍미했습니다. 나의 졸업논문도 임마누엘 칸트의 ‘비판철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의 은사 한 분은 1920년대 예나대학에서 훔볼트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신 분이었습니다. 나는 이분을 통해서 독일의 학문과 문화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내가 베를린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48년 6월의 봉쇄조치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1986년 11월 초, 나는 생애 처음으로 베를린을 찾게 되었습니다. 서독 기민당의 초청으로 8일간 독일을 방문하는 기회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당시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한국 국민의 투쟁은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980년부터 나는 두 차례에 걸친 2년 이상의 가택연금으로 모든 정치활동을 봉쇄 당하고 있었습니다. 1983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나는 목숨을 건 무기한 단식투쟁을 시작하여 23일만에 군사정권의 가택연금을 푸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나는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총집결시켜 본격적으로 민주화와 개헌운동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기민당이 한국의 탄압받는 야당 지도자를 초청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 세력에 대해 정신적인 격려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많은 독일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뜨거운 성원을 보내준 데 대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86년 독일방문에서 내가 처음 만난 베를린은 육지 속의 섬으로 외떨어지고, 다시 동서로 갈라진 ‘격리와 분단’의 도시였습니다. 초겨울의 음산한 날씨 속의 베를린 장벽은 더욱 어두운 빛을 띠고 분단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새봄의 기운이 싹트는 이 아름다운 도시의 한 가운데, 활짝 열린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이 곳에 왔습니다. 그 곳에는 시가지를 둘로 가르던 그 어떤 장벽도, 인간에게 비운을 강요하던 그 어떤 장애도 없었습니다. 자유의 축복 아래 모두가 하나되어 옛 상처를 치유하고, 번영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새 베를린이 있었을 뿐입니다. 내가 다시 만난 베를린과 처음 만나던 `86년 이후 세계는 바탕으로부터 바뀌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역사의 진전이 적어도 네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그 첫번째가 ‘인간의 자유화’를 향한 진전입니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열망은 작은 물결로 시작하여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엄청난 격량이 되었습니다. 이 격량 앞에 전체주의의 망령은 사라지고 ‘억압의 질서’가 종언을 고했습니다. 옛 소련과 동구를 넘어 지구 도처에 자유와 민주의 꽃이 피었습니다. 칠레와 필리핀에도 민주주의가 바로 섰습니다. 남아프리카도 흑백의 화학 속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찾았습니다. 한국에서도 나의 독일 방문 7개월 후인 `87년 6월, 시민항쟁을 통하여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이라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93년 2월, 마침내 문민정부가 출범하였습니다. 오늘의 세계사는 자유야말로 인간의 최우선 가치이며, 자유 없이는 번영도 없음을 실증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이제 세계의 보편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두번째는 ‘민족자주의 회복’입니다. 지난 수년간 유럽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면 인위적으로 합친 민족은 갈라지고 인위적으로 분리된 민족은 합쳐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혈통, 같은 언어 그리고 같은 문화를 인위적으로 갈라놓거나 서로 다른 혈통, 언어, 역사를 합치는 것은 그 자체가 또 다른 긴장의 원인이 됩니다. 구소련의 해체와 독일 통일의 예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평화의 확산’입니다. 유럽에서 시작된 긴장완화의 바람은 멀리 중동으로, 아프리카 남단으로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북아일랜드에서도 평화의 기운은 과거 어느 때보다 확연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평화의 봄은 앞으로 세계 각처로 확대되리라는 것이 나의 확신입니다. 물론 지금도 보스니아를 위시하여 세계도처에서 인종적, 종교적, 문화적 갈등으로 분쟁이 새로 생기고 살륙이 진행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보다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네번째는 ‘세계공동체의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점입니다.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른 동서간의 이념분쟁과 체제경쟁을 매듭짓고 세계는 마침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기축으로 하여 하나로 통합되어 가고 있습니다. 정보통신 수단과 항공기술의 비약적 발달은 지구를 더욱 좁은 마을로 변모시켰습니다. WTO의 출범은 국가간, 지역간의 상호의존성을 극적으로 증대시키고, 세계를 하나의 경제활동 무대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은 이제 통합의 마지막 거보를 내딛고 있습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또한 APEC이 정상간 회의체로 도약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화와 협력의 새 지평을 활짝 열었습니다. 미주에서도 NAFTA가 결성되어 지역공동체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나는 이러한 움직임들이 지역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전체의 행복과 번영, 자유와 평화를 위한 세계공동체의 굳건한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인류는 평화의 구축만이 아니라 인권, 빈곤, 질병, 난민, 환경, 핵 등 지구촌 차원의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함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며칠 후 참석하게 될 코펜하겐 유엔 사회개발정상회의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난 10년의 세계는 ‘인간의 자유화’, ‘민족자주의 회복’, ‘평화의 확산’, ‘세계의 공동체화’라는 방향으로 전진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진전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곳이 아마도 이 베를린일 것입니다. 1986년 당시에 4년 후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던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예측하지 못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역사의 힘입니다. 나는 이러한 네 가지 세계사적 변화의 힘이 머지않아 한반도에도 다가올 것이라 믿으면서, 유럽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나는 오늘 활짝 열린 브란덴부르크문을 지나오면서 판문점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계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남북관계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힘은 한반도의 통일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통일은 이제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와 방법의 문제입니다. 나의 관심은 독일 통일의 경험이 어떻게 한국에 적용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독일이 유럽통합에 참여한 것이 통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우리에게 매우 관심있는 문제입니다. 나는 지난 1957년 독일연방공화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이 독일 통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관해 벌어졌던 토론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당시 독일의 유럽통합 참여결정이 통일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올해 초 한국의 가장 중요한 국가목표로 세계화를 선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그 어떤 장벽도 과감하게 허물고 세계시민의 입장에서 의식, 제도, 관행 등 모든 것을 개방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과 국제적 고립 속에 있는 북한과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세계화가 한반도의 통일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촉진시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독일이 ‘유럽통합’ 아래 통일을 보다 순조롭게 달성한 것처럼 한국도 세계공동체의 큰 품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한반도의 독특한 상황 앞에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통일을 실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통일이 가능했던 것은 동, 서독간의 오랜 교류가 뒷받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독일과는 다른 역사를 물려 받았습니다. 남과 북은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동족상잔의 경험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한 상처는 오늘에도 깊게 남아 있습니다. 이념과 체제의 극단적인 대결이 반세기를 이어오면서, 지금 이 시간에도 100만 이상의 중무장한 병력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남북으로 흩어진 1천만의 이산가족들이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모른 채 단절의 50년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단절과 폐쇄 속에 남과 북은 이념과 제도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이질화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을 취하는 것이 현실적 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현재의 불신과 반목의 대치상태를 해소하고 상호간에 화해함으로써 교류, 협력하는 길을 터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교류와 협력의 축적은 남과 북이 상호 이질적인 요소를 극복하면서 서로의 부를 함께 키우는 조화와 공영의 기회를 줄 것입니다. 그 바탕 위에 남과 북이 '연합'을 구성하게 되면 한반도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인 통합은 본격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한국인의 자유로운 의사표명과 선택에 의한 정치적 통합으로 통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화해협력단계', '남북연합단계', '1민족 1국가' 의 3단계 통일방안입니다. 요컨대 남과 북이 급격한 통일에서 오는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며 점진적, 단계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민족공동체'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3단계 과정을 축소하기 위해 요구되는 어떤 노력과 희생도 감수할 것입니다. 우선 우리는 북한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을 지원할 것입니다. 또한 민간차원의 대북교류도 적극 권장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북한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그 어떤 분야에서도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곡물을 비롯, 북한에게 필요한 원료와 물자를 장기저리로 제공할 용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이 남북간에 이미 합의한 바 있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을 실천하는 성의를 보여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하루라도 빨리 상호 실체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상대를 비방하거나 혼란을 조성하려 할 것이 아니라 화해하고 협력하는 길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 발맞추어 나아가려면, 남과 북은 대담하고 결의에 찬 자세로 통일을 앞당기는 노력을 함께 기울여야 합니다. 유사한 상황에서 유사한 소망을 성취한 독일국민의 이해와 성원은 한국의 통일 노력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적인 역량과 세계인의 격려 아래 우리민족이 하나가 되는 시대를 반드시 열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독일과 한국은 각기 유럽과 아시아에서 서로 유사한 경험을 지니며 유구한 역사를 이어 왔습니다. 독일은 유럽의 중심에 위치함으로써 대륙의 격동과 떨어져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한반도 또한 아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가교가 됨으로써 이 지역의 풍상을 한몸으로 맞아 왔습니다. 양국민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찬란한 인쇄문화가 낳은 구텐베르그의 성서와 고려의 대장경은 두국민이 '문자의 민족'이자 '정신의 민족'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이 서양철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듯, 한국의 성리학은 동양철학의 거봉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국민은 3세기 전 독일의 신부와 한국의 왕세자간의 첫 해후를 통해 가연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한세기 전부터는 수교가 이루어짐으로써 더욱 깊은 우정을 쌓아 왔습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독일의 음악, 문학, 철학에 심취하며 한국의 법제에는 독일의 깊은 영향이 남아 있습니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큰 한국의 무역 파트너 입니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한국 교민과 유학생이 살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서는 독일어가 가장 중요한 제 2외국어가 되고 있습니다. 독일과 한국을 더욱 가깝게 이어준 것은 전후의 세계사가 가져다 준 민족분단이라는 공통의 아픔이었습니다. 여기에 두 국민이 함께 추구해온 공통의 가치와 목표는 연대의식을 더욱 굳건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자유의 최전진 기지였던 서베를린과 서울은 깊은 운명적 유대를 느껴왔습니다 서베를린의 자유는 곧 서울의 자유였습니다. 서베를린이 봉쇄되었을 때,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었을 때, 서울은 지대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서울이 점령당했을 때, 서울이 끊임없이 위협을 받을 때, 여러분은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져, 번슈타인의 베를린 펄하모니가 베토벤 제9교향곡의 '환희' 를 '자유' 로 노래했을 때 서울은 진정 환희였습니다. 서베를린의 승리는 서울의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통일도 꿈이 아니라 현실로 이를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찬란합니다. 베를린과 서울이야말로 지난 반세기를 통해 세계 어느 도시보다 빛과 그림자, 희망과 좌절이 극적으로 교차된 곳이었습니다. 두 도시는 자유는 결코 억압될 수 없음을 역사 속에 실증했습니다. '라인강의 기적'에 '한강의 기적'으로 화답한 것처럼 독일의 통일은 한반도의 통일로 이어 질 것입니다. 분단된 독일보다 통일된 독일이 유럽과 세계에 더 큰 기여를 하고 있듯, 분단된 한국보다 통일된 한국이 아시아와 세계에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훌륭한 것은 대부분 멀리 떨어진 곳에 존재하므로 낯선 것을 피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베를린과 서울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보다 긴밀한 유대 속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진전시키는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21세기 희망의 세계를 향해 우리 두 나라 국민이 함께 손잡고 나아갑시다. 서울과 베를린이 세계공동체의 선봉이 되게 합시다. 오랫동안 경청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