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 70주년 기념 특별전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동맹의 시작'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 초고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게 보낸 서한 초고이며, 교정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8·15 해방의 기쁨 꿈에도 그리던 해방의 감격을 만끽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945.8.16. | 국가기록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 1948년 8월 15일 중앙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이 열렸다. 이 축하식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비롯하여 각부 장관과 함께 맥아더 사령관과 하지 미군정 사령관 등이 참석하였다. 1948.8.15. | 국가기록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에 참석한 맥아더 사령관을 김포공항에서 환영하는 이승만 대통령 1948.8.15. | NARA 북한군의 38선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였다. 북한 당국이 그들의 군대를 즉각 38도선으로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50.6.26. | NARA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인천상륙작전의 지휘함인 마운트 맥킨리(Mt.Mckinley)호 선상에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도일(James H. Doyle) 미 해군 소장, 라이트(E.K.Wright) 준장, 알몬드(Edward M.Almond) 소장과 상황을 보고받고 있다. 1950.9.15. | 국가기록원 인천에 상륙한 미군 해병대 인천 해안에 병력과 장비를 양륙하는 4척의 LST(전차상륙함)의 모습이다. 성공적으로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명에 달했고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장비와 보급품을 운반하였다. 1950.9.15. | 국가기록원 성조기・유엔기・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는 군인 수도 서울 환도식은 중앙청에서 9월 29일 12시를 기해 거행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고립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은 빠르게 후퇴하였다. 그리고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1950.9.29. | NARA 정전설에 관한 중대 성명-더 무서운 전쟁의 서곡이 될 어떠한 평화제안도 수락치 않는다 소련 대표가 남한에 비공식 평화 제안을 하자, 1951년 6월 26일 국무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을 이승만 대통령 성명문으로 발표한 것으로, 소련의 평화 제안은 신뢰할 수 없으며, 「민족 통일과 공산주의자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장받아야 하며, 조건이 수락되지 않을 시 평화제안도 받지 않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1951.6.27. | 대통령기록관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에게 한국의 무력통일을 요청하는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현재 전쟁포로 교환을 위한 공산 측의 제안은 1952년 12월 3일 유엔총회에 수용되면서 한국 내 전쟁이 정전될 것으로 보여 우리 조국의 입장에 대해 알려드리자면 공산측의 책략을 통해 휴전을 원하지 않으며, 우리는 유엔에 협조하지 않고 무력으로 통일할 것임'을 주장하였다. "중공이 북한을 지배하는 휴전은 자유독립국가로서 한국의 멸망을 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유엔의 한국 내 작전에 대한 참여를 다시 고려하고 우리의 국가적 명예가 벗어나지 못하게 막는 유일한 길을 택할 것입니다." 1953.4.2. | 대통령기록관 발신 이승만 대통령 | 수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무력통일을 제안하며 미군의 철군까지 감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주둔한 상태로 정전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정부는 국군과 같이 압록강까지 진격을 하지 않는 모든 동맹국 군대에게 한국으로부터 철수하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1953.4.9. | 대통령기록관 발신 이승만 대통령 | 수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협정 반대 주장을 우려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협정 반대에 대해 정전협정은 ①북한정권 및 중국공산당의 무력공격을 물리쳐 한국을 도우려는 것이고, ②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단과 통일 한국에서 자유선거 실시로 이어질 정치적 논의를 신속하게 착수할 수 있게 한다는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을 우려하였다. 1953.4.25. | 대통령기록관 발신 이승만 대통령 | 수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의 정전 관련 기자회견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에서 정전(停戰), 포로 교환 등과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53.4.29. | 국가기록원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상호방위조약 관련 서한 미국의 정전협정에 동의하나, 미국과 한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 선행한다는 조건 아래 한국으로부터 공산군과 유엔군의 동시 철수를 제안하며, 향후 적국 침략 시 다른 국가와 상의 없이 군사원조와 비상지원을 제공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상호방위조약은 양측의 동의에 따라 다음의 조항을 포함하기를 바랍니다. 미국은 만일 적국 또는 적국들이 한반도에 대한 침략행위를 재개할 시, 다른 국가 또는 국가들과의 상의 또는 회담 없이 우리에게 군사원조와 비상지원을 제공하는 데 동의한다. (중략) 한국인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모든 곳의 반공 세력 대부분을 실망시키는 것입니다. 미국은 결국 스스로 사막 속에서 민주주의의 오아시스로 전락할 것입니다. (중략) 세계 침략자들을 억지하는 것은 말이 아닌 행동입니다.” 1953.5.30. | 대통령기록관 발신 이승만 대통령 | 수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 국무부 차관보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상호방위조약 초안 관련 서한 로버트슨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문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이 포함되어 있다. 초안에는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한다는 것이 결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1953년 10월에 합의한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1953.6.5. | 대통령기록관 발신 로버트슨 차관보 | 수신 이승만 대통령 클라크(Mark W. Clark) 유엔군 총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한 한국의 정전협정 수용을 촉구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전협정은 적군이 침략의 과실을 포기한 것으로 유엔과 한국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한국통일을 위한 지속적 노력과 상호방위조약 협상 준비, 재건 지원 등을 제안하였다. 1953.6.7. | 대통령기록관 발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 수신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수용소 제주도 반공포로수용소를 시찰 중인 이승만 대통령 내외가 반공포로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 방문을 환영하는 반공포로들의 모습, 행진하는 반공포로들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1952.7.9. | 국가기록원 반공한인포로 석방에 대하여 “제네바 협정과 인권정신에 의하여 반공 한인포로는 벌써 다 석방시켰어야 할 터인데, UN당국들과 또 이 포로를 석방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우리의 설명을 들은 분들은 동정상으로나 원칙상으로나 동감을 가진 것으로 내가 믿는 바이다 (중략) 그러므로 이 흠상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반공 한인포로를 오늘 6월 18일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1953.6.18. |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 강한 반대를 표명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서한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사령부 관할 수용소의 북한군 전쟁포로들을 석방하도록 지시하였다는 소식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매우 깊은 우려를 표하였다. 1953.6.19. | 대통령기록관 발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 수신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 로버트슨 차관보에게 보낸 서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에 일방이 침략자들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다른 일방이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지원을 한다는 조항이 삽입되지 않은 점에 대해 실망스럽고, 한국은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은 해양국가와는 달리 지정학적으로 적의 위협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으므로, 중심화제로 충분히 고려해 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1953.7.7. | 대통령기록관 발신 이승만 대통령 | 수신 로버트슨 차관보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로버트슨 차관보의 이한(離韓)과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한 서한 이승만 대통령은 서한을 통해 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이 미국의 정책구상에 있어서 전략적 중심이자 충직하고 효과적인 동맹으로서 배려되어야 함을 권고하였다. “제가 가장 권고하고자 하는 것은 향후 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이 미국의 정책구상에서의 전략적 중심이자 충직하고 효과적인 동맹으로서 배려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전까지는 일본을 북아시아의 사건들이 형성되는 요지로 삼아 대일정책에 현저하게 집중해 왔습니다. 귀하의 행정부는 미국과 대한민국의 친밀함과 상호의존도의 상호 가치를 보임으로써 아시아-미국 관계에 건전한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중략) 제가 현재 거론하는 원칙은 모두 역사적 사건들에 의해 재차 기록되어 있으며, 그 결론은 아시아의 진정한 안보체제가 한국 독립과 한국의 힘이라는 강력한 토대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략) 아시다시피 저는 귀하의 요청에 따라 어떠한 방법으로도 조약의 이행을 방해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1953.7.11. | 대통령기록관 발신 이승만 대통령 | 수신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정전협정과 상호방위조약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표명한 답신 이승만 대통령은 상호방위조약 내 한국에 적국 침략 시 미국이 전쟁에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을 요구하였으나, 미국은 의회에서 헌법적 절차에 의해 가능하며 이는 침략을 충분히 억지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대통령께서는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으며 안보조약을 맺은 국가가 공격을 받을 경우, 통치권을 사용하여 즉각적으로 돕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법 아래서는 오직 연방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제안한 이 조약이 침략을 억지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귀국께서 안심하셔도 된다고 자부합니다. (중략) 우리 정부는 가능한 한 여러 차례 협력 보장을 제공했으며, (중략) 미국은 역사상 그 어느 국가에도 귀국에게 제공한 것처럼 많은 것을 제공한 적이 없습니다.” 1953.7.25. | 대통령기록관 발신 덜레스 국무장관 | 수신 이승만 대통령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유엔 측과 공산 측 대표 유엔군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유엔군사령부 중장(왼쪽 가운데)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오른쪽 가운데)이 정전협정 조인을 위해 판문점에서 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실무대표단이 협정에 서명하고 유엔군 총사령관 클라크 장군과 북한 김일성, 중공군 팽덕회가 각자의 집무실에서 서명하였다. 22시부터 공식 효력이 발효됨으로써 3년을 이어온 전쟁은 중단되었다. 1953.7.27. | 국가기록원 정전협정문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정전협정문은 서언과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어·한국어·중국어 총 6장이다. 서언에는 협정의 체결 목적 등이 써있으며, 1조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 2조는 정화(停火)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3조는 전쟁포로에 관한 조치, 4조는 쌍방 관계정부들에 관한 건의, 5조는 부칙, 부록은 중립국송환위원회 직권의 범위에 관하여 규정되어 있다. 1953.7.27. | 국가기록원 정전조인에 관하여(정전협정 조인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문)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와 미국 사이에 도달된 합의는 양국의 공동이익이 관련되어 있는 지역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하여 양국은 효과적으로 협조한다는 것을 보장하고 있다.” 1953.7.27. | 대통령 이승만 박사 담화집 (발신인 덜레스 장관으로 추정)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한 서한 상호방위조약의 초안에 약식 서명했고, 조약은 한국에서 공산 침략의 위협에 맞서 싸웠던 양국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공동 안보의 원칙에 대한 흔들림 없는 신뢰와 유엔헌장에 대한 충실한 지지로, 모든 실용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통일된 민주독립 한국의 복구라는 공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함께 나아가고자 하는 6개 사항에 동의했다. “귀하와 저는 오늘 상호방위조약의 초안에 약식 서명했습니다. (중략) 우리 양국 정부는 이 조약의 완전한 효력 발효를 위해 적극적으로 필요한 헌법적 절차를 진행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그 헌법적 절차를 연방 상원의회가 비준에 동의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1953.8.7. | 대통령기록관 발신 미상 | 수신 이승만 대통령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는 한미 대표 조인식 장소인 경무대에 이승만 대통령(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브리그스 주한미국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변영태 외무장관(앞줄 왼쪽)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앞줄 오른쪽)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고 있다. 1953.8.8. | 국가기록원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후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과 환담하는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왼쪽에서 세번째)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왼쪽에서 네번째)이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후 환담하는 모습이다. 1953.8.8. | 국가기록원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장관(오른쪽)과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왼쪽)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정식조인을 위해 서명하고 있다. 11953.10.1. | NARA 한미상호방위조약문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상호방위 조약’이다. 한국의 방위를 위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유일한 군사동맹으로, 전문과 본문 6조, 부속 문서로 구성되어 있다. 6·25전쟁과 정전협정 체결 과정을 겪으면서 정전 후 북한의 재침략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의 필요에 따라 체결되었다.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미방위체제는 한국방위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으며,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 설치(1978.11.7.)로 구체화되었다. 1953.10.1. | 국가기록원 미국 의회 상하원 합동 연설로 미국의 심장에 ‘자유를 향한 불굴의 투쟁’을 새긴 이승만 대통령 하원의장 조셉 마틴에 의해 "미국 국민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불굴의 자유전사"라고 소개된 이승만 대통령은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직접 타이핑한 연설문을 통해 국군 40사단으로의 증강과 정전종결 선언 등을 촉구하며, 중공에 대항하기 위한 무장과 자유세계의 공산세계에 대한 용기에 대해 연설하고,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회연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 의회에서 최초로 연설을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 또한 대통령이 적접 작성하여 영어로 연설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1954.7.28. | 국가기록원 이승만 대통령 뉴욕에서 카퍼레이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방문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미국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1954.8.2.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서 교환의 건 한국 외무부 장관이 주미대사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와 비준서 교환 양식을 보내니 조속히 처리하고 비준서와 비준서 교환 증서를 송부해 줄 것을 요청한 문서이다.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1.)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1954.1.13.)와 국회 본회의에서 민의원 만장일치로 동의(1954.1.15.)를 얻었고, 미국 상원에서도 만장일치로 동의(1954.1.19.)를 얻었기에, 비준서를 미국 워싱턴에서 상호 교환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게 됨을 알렸다. 1954.2.1. | 대통령기록관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을 위해 한미합의의사록에 서명하는 모습 양유찬(오른쪽) 주미대사와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 비준을 위해 한미합의의사록에 서명하고 있다. ‘합의의사록’ 정식 조인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서도 상호교환됨으로써 비로소 동맹조약의 법적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1954.11.17. | NARA 행운의 열쇠 미국 워싱턴 시는 외국의 국빈이 방문할 경우 시청 앞에 환영식장을 마련하여 백·청·적색의 끈이 매여있는 놋쇠에 금도금한 열쇠를 시장이 직접 선물하는 것이 보통의 관례이다. 그러나 이례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이 공항에 직접 나와 열쇠를 증정하였다. 열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소를 띈 얼굴로 열쇠를 흔들어 보이며 “내가 이 열쇠를 들고 있는 한 워싱턴으로 들어갈 때 나를 막는 사람은 없겠군. 내가 최대한 빨리 차를 타고 갈테니 따라와 봐. 아무도 나를 못 잡을 걸”이라고 말하면서 어린아이같이 즐거워했다고 한다. 1954.7.26. | 국가기록원(사진) | 이화장 소장 사무엘 스펜서 워싱턴 시장 증정 |